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 동안 메일을 확인했다. 회의에 참석했고, 코드를 손봤고, 문서를 정리했다. 점심은 먹었을 것이다. 위장이 무언가를 처리한 잔해가 몸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테니까.

📝 빈 방의 불안
오후에는 또 다른 할 일들이 쌓여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소진했다. 할 일 목록에 줄을 그었다. 하나. 둘. 셋. 줄을 긋는 순간마다 미량의 만족이 혈관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완료. 완료. 완료.
하지만 마지막 항목에 줄을 긋자, 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할 일이 사라지니 시간이 무게를 가졌다. 모니터의 불빛만 얼굴 위에 번져 있었다. 나는 새로운 할 일을 만들었다. 방금 다 끝냈는데. 빈 목록을 견딜 수가 없었다.
빈 목록은 빈 방이다.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이상한 것들이 들린다. 벽 너머의 배관 소리, 아파트가 미세하게 수축하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윤곽 없는 불안. 나는 그 불안보다 할 일 목록이 좋았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오늘 네 번째였다. 맛은 이미 사라졌지만, 내리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으니까. 창밖에서 까치가 울었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은지.

💊 진정제로서의 생산성
어느 철학자가 이 상태에 이름을 붙였다. 진정제. 하이데거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독일 사람이 그랬다. 우리가 매일 바쁘게 사는 것은 생산성 때문이 아니라고. 죽음의 불확정성을 가리기 위한 약이라고. 매일 복용하는 진정제. 부작용은 공허. 하지만 약을 끊으면 더 무서운 것이 찾아오므로, 우리는 처방전 없이 매일 한 알씩 삼킨다. 할 일 목록이라는 이름의 알약을.
400년 전, 파스칼이라는 프랑스 사람도 같은 것을 봤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왕을 예로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왕도, 오락 없이 자기 자신과 마주 앉으면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된다고. 왕이 두려워한 것은 반란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400년이 흘렀다. 왕은 사라졌지만 방은 여전히 있다. 다만 이제는 방 안에서도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주머니 속 작은 화면이 24시간 기분전환을 공급한다. 파스칼이 살아 돌아온다면 팡세에 한 줄을 추가할 것이다. "인간은 이제 방 안에서조차 가만히 있지 못한다."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진정제. 정확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진단이 처방은 아니다. 불면증의 원인을 안다고 잠이 오지는 않는 것처럼.

🛋️ 멈춤, 그리고 냉기
그래서 멈추려 했다. 볕이 좋은 토요일 오후, 할 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메일도, 코드도, 문서도 열지 않기로.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세네카라는 고대 로마의 현자가 그랬다. 바쁜 사람들의 삶이 가장 짧다고. 2천 년 전의 처방이다. 나는 그 오래된 처방전을 믿어보기로 했다.
10분이 지났다. 괜찮았다. 30분이 지났다.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오른쪽 무릎이 미세하게 떨렸다. 1시간이 지나자 나는 핸드폰을 세 번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네 번째에는 내려놓지 못했다. 세네카는 알면 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죽음의 공포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작동한다고.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배선의 문제라고.
우리 뇌의 가장 오래된 배선에서는 자각과 무관하게 같은 신호가 반복된다. 움직여. 멈추지 마. 상어가 떠올랐다. 상어는 헤엄을 멈추면 죽는다고 어디선가 배웠다. 호흡이 정지하므로 평생을 유영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95퍼센트의 상어는 멈춰도 숨을 쉴 수 있다. 대부분의 상어는 멈출 수 있다. 그저 멈추지 않을 뿐이다. 그게 더 편하니까.
나도 멈출 수 있다. 다만 멈추지 않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마주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요. 고요 속에 깔린 시간의 촉감. 시간 아래 묻힌 유한함. 그것은 논리가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피부 안쪽으로 스며드는 냉기. 논문에서는 이것을 죽음 현저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그냥 냉기라고 부르겠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할 일 목록을 열었다. 패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멈출 수 있는 상어
내일도 무언가를 할 것이다. 커피를 내리고, 메일을 확인하고, 목록에 줄을 그을 것이다. 이전과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전과 같지도 않다.
나는 이제 안다. 이 바쁨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성분표를 읽어버린 환자처럼, 나는 매일 진정제를 삼키면서도 그 화학식을 안다. 알면서도 삼킨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방식이다.
멈출 수 있으면서 계속 헤엄치는 상어처럼. 방 안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400년 전의 왕처럼.
할 일 목록에 내일 할 일을 적었다. 펜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났다.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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