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이다. 30년은 족히 넘은 노래가 편의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무언가를 집어 들려던 손이 멈춘다. 뭘 사려고 했는지도 잊는다. 왜 멈췄냐고 묻는다면, 그 노래로 다른 노래를 만들던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노래를 가난이라는 서랍에 넣어 잠가 두었다. 그 서랍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 서툰 선율의 기억
열다섯 살의 나는 교실 창가에 앉아 있다. 공책 한쪽에 오선지를 긋고 음표를 올려놓는다. 하나 올리고, 하나 내리고, 다시 올린다. 선율이라고 부르기엔 서툴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나는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편지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다. 가사는 반 이상 잊었는데, 후렴 첫 마디에서 목이 잠기는 건 여전하다. 아마 성대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 닫힌 서랍들
수업 시간에 연필로 책상을 두드렸다. 리듬이 맞으면 기분이 좋았고, 안 맞으면 다시 두드렸다. 나는 음악 쪽으로 자꾸 손이 갔다.
어느 날인가, 내가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왜 아직도 기억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가수가 되겠다고 입 밖에 꺼냈을 때, 아버지는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봤다. 그 눈빛 한 번이면 충분했다. 가난한 집에서 그 꿈은 사치였고, 나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누군가 앞에 서서 무언가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에게 노래와 그림을 만들어서 줬다. 맞나? 아닌 거 같다. 줬다는 말은 맞지 않는거 같다. 건넨 적이 없으니까.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어느 서랍 위에 올려두고 왔다. 그 서랍은 그녀의 것이었을까. 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도 없을 때.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 말도 못 할 게 뻔했으니까.
나는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삼키고, 줘야 할 마음은 주머니에 구겨넣은 채 돌아서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시선을 바닥에 두는 버릇. 그 버릇은 늙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 앞에서 나는 같은 자세로 굳는다.
꿈도 그런 식으로 놓고 왔다. 악보 위 음표들처럼 한참을 오르내리다가, 결국 어딘가에 접혀 사라졌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했다. 가난은 편리한 서랍이었다. 처음부터 가난을 변명으로 내세운 건 아니었다. 책을 못 사고, 친구들과 함께 어딜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되면서 알았다. 가난이 내 꿈을 하나씩 포기하게 만든다는 걸. 나는 포기들을 그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 잠가 두었다. 그 안에 넣어두면, 누구도 꺼내 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소심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 거울 속의 진짜 얼굴
나는 오랫동안 가난 때문이라고 믿었다. 돈이 없어서 음악을 못 배웠고, 형편이 안 돼서 꿈을 접었고, 환경이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주지 못한 거라고. 그 이야기는 단단했고, 나는 그 안에서 편안했다. 누가 물어도 같은 대답을 했다. 잘 외운 대사처럼.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본다. 가난에서는 벗어났다. 월급은 통장에 찍히고,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있고, 새벽에는 커피를 내려 마실 여유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건네야 할 마음을 내일로 미루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핑계였던 것 같다.
가난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겁이 많았을 뿐이다. 실패할까 봐. 거절당할까 봐.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노래가 별것 아닌 걸로 드러날까 봐. 가난은 그 겁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아무도 가난한 아이의 포기를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 동정의 그늘 아래 오래 서 있었다.
거울은 좌우가 뒤집힌다. 내가 기억하던 그때도 뒤집혀 있었다. 가난이 앞에 서고 두려움이 뒤에 숨는 구도. 진짜는 반대였다.

📻 다시 흐르는 노래
다시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는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책상 서랍 위에 노래를 올려놓고 복도를 뛰어간 너에게. 아버지의 눈빛 한 번에 입을 다문 너에게. 가난이라는 서랍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너에게.
너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같은 곳에서 멈칫하고, 같은 방식으로 입을 다물고, 같은 종류의 두려움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 나이 먹도록 달라진 게 없는 내가 한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젯밤에도, 새벽에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이상한 일이다. 한심하지가 않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네가 아직 여기 있다는 말이다. 겁이 많았지만 그래도 노래를 만들 줄 알았던, 건네지는 못했어도 놓고 올 줄은 알았던, 그 아이가 아직 내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너는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랍을 열자. 다시 꺼내 보자.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네가 다시 부르기 시작한다면."
오늘의 나를 위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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