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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Technicus11 min

기억을 맡긴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

잃는 걸 알고 잃는 것과, 모르고 잃는 것은 다릅니다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판단의 근거까지 밖에 둡니다. 기억을 외주화한 자리에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지, 조금 불편한 질문을 해봅니다.

기억을 맡긴 사람은 무엇을 잃는가
DMS / VISUAL ESSAY

지금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몇 개인가요.

저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어릴 때 살던 집이고, 하나는 지금 쓰는 제 번호입니다.

어릴 때 살던 집 번호는 이제 아무 데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 집은 없어졌고, 그 번호는 다른 사람에게 갔을 겁니다. 쓸모가 사라진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매일 연락하는 사람들의 번호는 하나도 모릅니다.

이번엔 조금 다른 지점

이걸 손실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기억은 원래 밖에 두는 것이었다는 반론도 타당합니다.

문자, 종이, 책, 사진. 인류는 계속 기억을 몸 밖에 옮겨왔습니다. 그때마다 같은 걱정이 있었고, 그때마다 걱정은 대체로 기우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옮겨지는 것의 종류가 다릅니다.

옮긴 것은 기억이 아니라 판단이다

책은 기억을 저장했습니다.

꺼내 쓰려면 내가 찾아야 했고, 읽어야 했고, 앞뒤를 맞춰야 했고, 다른 책과 비교해야 했습니다. 저장은 밖에 있었지만 판단은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 옮겨지고 있는 건 그 판단 쪽입니다.

표가 넓으면 좌우로 스크롤하여 확인하세요.

예전지금
지도를 펴고 경로를 고름경로가 계산되어 나옴
서점을 돌며 무엇을 읽을지 정함추천됨
빈 화면에서 첫 문장을 씀초안이 나옴
여러 자료를 읽고 결론을 냄요약과 결론이 함께 제시됨

각각은 편의입니다. 하나씩 보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합치면 성격이 달라집니다. 판단의 재료를 모으고, 비교하고, 틀려보고, 수정하는 과정 전체가 밖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결과를 받습니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근거다

흔한 걱정은 "능력이 퇴화한다"는 쪽입니다. 저는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봅니다.

계산기를 쓴다고 수학을 못 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계산에서 풀려난 자리에서 더 복잡한 것을 다루게 됐습니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겁니다.

내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

예전에는 결론에 이르는 길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틀렸을 때 어디서 틀렸는지 되짚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잘못 봤구나, 하고요.

지금은 결론만 받고 근거는 밖에 있습니다. 되짚으려면 다시 물어봐야 하고, 그때 돌아오는 설명이 처음의 근거와 같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건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책임의 문제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판단을 내 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서 "그러니 쓰지 말자"로 가면 게을러집니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기술 도입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잃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쪽이 더 잘 씁니다.

문자가 기억술을 약화시킨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문자를 택한 건 얻는 게 더 컸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잃는지 알고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 가지를 지키려고 합니다.

하나. 결론보다 근거를 남깁니다.

도구가 준 답을 그대로 저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 답을 받아들였는지 한 줄을 함께 적습니다. 나중에 되짚을 수 있는 건 그 한 줄뿐입니다. 답은 다시 받을 수 있지만, 그때의 제 판단은 다시 못 받습니다.

둘. 틀려보는 구간을 남겨둡니다.

전부 최적 경로로 가면 지도는 영영 생기지 않습니다. 목적지에는 매번 도착하는데 그 동네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는 일부러 비효율을 감수합니다. 아는 길을 다르게 가보는 것 정도로요. 그게 감각을 유지하는 비용입니다.

셋. 어떤 판단은 밖에 두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 오래 남을 결정.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이건 느려도 안에서 합니다. 느린 게 목적입니다. 빨리 내린 결정과 오래 붙들고 있던 결정은, 나중에 그 결정을 감당하는 무게가 다릅니다.

남는 질문

기억을 밖에 두는 것과 나를 밖에 두는 것 사이에 선이 있다면, 그 선은 어디쯤일까요.

저는 아직 답을 모릅니다.

다만 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어느 날 넘어간 뒤에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잃는 걸 알고 잃는 것과, 모르고 잃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차이를 유지하는 일 정도인 것 같습니다.

쓸모가 사라진 지 이십 년이 넘은 번호를 아직 외우고 있는 것처럼, 남는 것은 대개 필요해서 남는 게 아닙니다. 오래 붙들고 있어서 남습니다.

리도 프로필

리도 인사이트

기술을 현장 언어로 다시 풀어 쓰는 사람

3D 설계, 광통신 인프라 장비 개발, 글로벌 현장 교육을 19년 넘게 다뤄왔고, 요즘은 AI 자동화, 꿈꾸는 카메라, 실무 채널 운영을 연결해 복잡한 일을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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